단순히 해가 지고 있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소주한잔 마시고 싶어진다. 운이 좋다면 괜찮은 단풍과 적당히 구르는 낙엽에 주홍빛으로 식어가는 서쪽하늘을 감상하며 소주한잔을 떠올리기도 하고, 특별히 고달픈 삶이라면 일에 치여 하루를 보내다 뒤늦게 사라져가는 노을을 발견하고 씁쓸해진 기분에 소주한잔 떠올릴 수 있다. 

 적당히 쌀쌀해진 바람이 턱 아래를 스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수 있는 날씨라면, 무심코 거리를 나서려다 벗어둔 외투를 찾으러 다시 돌아 올만한 계절이라면, 칼칼해진 목구멍을 적셔줄 자극적인 액체가 생각난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달을 투명한 소주잔에 담아 마시고 싶어진다. 깊어진 가을의 씁쓸한 기분을 담아 마시기도 하고, 이제는 좀 잊힐 만도 한 그녀의 얼굴을 담아 마시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설프게 마신 밤에는 무척 외롭고 더 쓸쓸해지니까. 고요해지는 밤이 두려워지니까 한잔 더 마신다. 그렇게 또 마시고 술에 취해 편히 잠들 수 있으면 충분하다. 

 알코올 의존증 중증환자가 권하는 음주권장 이야기.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를 무척 흥미롭다는 듯 들어줬었다. 난 그녀의 이야기에 상당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난 그녀의 이야기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난 그녀가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고, 내가 그녀와 조금 더 특별한 관계가 되려는 걸 불편해 했었다. 그저 지금처럼 좋은 친구로 남아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걸 운명처럼 다가오는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난 그녀에게 특별함도 없었고, 운명 같은 느낌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녀와 더 가까워지기 힘들게 했었다. 

 그래서 난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했었다. 우연처럼 그녀와 마주치려 노력했었고, 구차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기 위해 참고 또 참았었다. 그저 최소한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처럼 보이기 위해 자주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았었고, 가능하면 우연처럼 마주치려고 그녀의 앞에 자주 나타나고 싶은 걸 또 참았었다. 

 그런 그녀와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서 난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지 못했었다.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과 조금씩 움직이는 입술. 비슷한 간격을 두고 깜박이는 눈꺼풀과 짙은 속눈썹. 가끔씩 그녀가 왼손을 들어 쓸어 올리는 귀밑 머리카락과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 가끔씩 테이블을 살며시 두드리는 검지와 손바닥 아래로 자주 숨는 엄지. 그 손등위에 쏟아지는 햇살에 살짝 보이는 솜털들까지. 그녀의 모든 걸 눈에 담느라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답답했다니까?”

 “그랬겠다. 나라면 정말. 참 모르겠다. 나도 답답했을 것 같아”

 그녀가 그 전에 어떤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렇게 답답해졌었는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난 그저 그랬으려니 하면서 맞장구만 쳐줬었던 것 같다. 그러면 또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었다. 

 가끔은 그녀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었다. 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 내 눈 안에 그녀를 충분히 담고 나면,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이야기들에 힘들어 해야 했다.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만한 고민들을 과장해서 힘겨워하고 있기도 했고, 누구나 겪을만한 일들을 지나치게 힘겨워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들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러면 난 또 맞장구쳐주며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녀는 그런 나와의 대화에 상당히 만족하는 것 같았다. 

 “후아~ 오늘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아”

 “그래? 우리 언제 또 볼까? 다음 주 토요일 어때?”

 “토요일? 그래? 그럴까?”

 “그럼 우리 데이트 하는 거야?”

 “데이트?”

 “농담이야 농담”

 내가 슬쩍 건넨 데이트라는 말에 기겁을 했었다. 아직 너와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우리 사이의 우정을 사랑으로 깨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었다. 난 이미 널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난 또 그녀가 원하는 데로 그녀의 좋은 친구역할에 충실하기로 했었다. 

 그래도 그녀는 나와의 일방적인 대화에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았다. 

 “너 오늘 좀 달라 보이는 것 같아” 

 “신발을 새로 샀거든”

 “신발? 아~ 그래. 괜찮네.”

 “고마워”

 난 일방적으로 그녀와의 인연을 만들어나갔다. 그녀는 내가 만들어내는 인연을 점점 운명으로 받아드리기 시작했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녀도 내가 상당히 많은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눈치 채기 시작했었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었다. 진실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라크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선출되었는지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세상은 진실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고 한다. 누구나 그렇다. 진실을 말하는 이들도, 진실을 거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진실은 나보다 후대의 역사에서만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다. 내가 겪어야 하는 세상은 진실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내가 겪은 그 사람도 그랬다. 

 언제나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서있던 그녀가 어느새 내 곁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만들어낸 인연을 운명이라 믿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언제나 나와 걷고, 나와 이야기하고, 내 손을 먼저 잡고 싶어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들어주기보다, 그녀를 품에 안으려고 했었다. 언제나 받아주기만 하던 그녀의 이야기를 내가 끊기도 했었다. 그녀는 나와 걸으며 대화 나누는 걸 좋아했었는데, 난 항상 그녀의 방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었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숨소리와 내 피부와 맞닿은 그녀의 피부가 숨 쉬는 느낌이 좋았었다.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든 고민들에 맞장구 쳐주기보단, 그녀에게 훈계를 하려고 했었다. 

 언젠가 그녀가 내 품안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이야기에 난 그녀에게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세상에는 훨씬 더 끔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랐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연락이 끊겼었다. 

 더 잘할 수 있었다. 분명히 난 잘할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사랑을 위해 진실을 혼동하고, 내가 만들어낸 운명을 스스로 벗어나려 했었다. 과거에 대한 진실을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내가 사랑했던 마음만은 알아주길 바랐었다. 

 잘할 걸 그랬다. 

 그 기억들로 또 소주한잔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