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그래... 오빤... 괜찮.....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아아악.”
예진이는 골프공의 안부를 묻는데 그치고 그쯤에서 저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분명 그래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는, 안부를 묻기만 하고 손은 가만 두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꼭 그래야 했습니다. 그래야 제가 원래 하려던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스런 이 아이는, 저에 대한 애정과 갑자기 닥친 상황에 대한 우려와 궁금증이 컸던 나머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하고 맙니다. 제 사타구니 사이에서 탱탱하게 부어오른 채 응급상황에 처해 있는 골프공들을 갑자기 갈퀴처럼 활짝 벌린 오른손으로 꾸욱 안아 쥔 것입니다. 그것도 애정을 가득 담아 양쪽의 두 개 모두를 한꺼번에 시원스럽게 말입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예진이는 거기에 한술 더 떠 제 딴에는 부드럽게 마주 비벼주더군요. 마치 연세 드신 어른들이 호두알 두 개를 손아귀에서 굴리며 드르륵 드르륵 비벼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 순식간이었습니다. 네? 어땠냐고요? 크크크. 차라리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 계집! 순간 숨통을 끊어놓고 싶었습니다. 애인이고 사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습니다. 당시 제 손에 K-14 저격용 라이플 소총이라든가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AK-47 소총이라던가 하다못해 캐냐나 우간다 혹은 탄자니아의 반군들이 사용하는 정글도 같은 대인 살상용 무기라도 있었다면 그 계집은 그날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았을 겁니다. 어휴.
이건 뭐, 과장 안 보태고 딱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더군요. 얼마나 아프고 열이 받던지, 이 계집이 필시 장난으로 가장해 날 죽이려는 수작인 줄 알았습니다. 아---- 정말... 25년이 지났는데도 새삼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되는군요. 아흐--- 정말이지.
이 아픔을 어떻게 설명해야 알까요? 이건 살면서 흔히 접하는 표피적인 아픔이 아니고 저 아래 몸의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웅혼한 아픔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웅혼이 이런 데 갖다 붙이라고 만들어진 말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혹은 근원적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일단 하복부 전체가 먹먹해집니다. 155미리 박격포의 2m 앞에 서서 발사되는 포탄을 아랫배에 맞아버린 느낌입니다. 이건 뭐 똥자바리까지 쪼개지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몸뚱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버린 듯한 느낌까지 옵니다. 아프다 소리도 잘 못하게 되지요, 이때는. 느낌 아시겠습니까? 정말요?
골프공은 어떻냐구요? 군인들이 신는 전투화라는 신발이 있습니다. 보통 군화라고 부르지요. 엄청나게 튼튼하고 묵직하고 강한 신발입니다. 군인 아닌 멀쩡한 사람들이 살짝 신어보기만 해도 묘하게 호전적 전투 의지를 고양시키는 기능이 이 신발에는 있습니다. ‘함 붙어 볼래?’ 뭐 이런? 신체 건장한 군인이 전투화를 신고서 발뒤축으로 팍팍 내리찍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목표물을 겨냥한 뒤 힘과 체중을 모두 실어서 뒷굽으로 죽으란 듯이 반복해 찍어대는 거죠. 뭘요? 제 불알을 말입니다. 네, 골프공을 말입니다. 그 정돕니다. 제가 느낀 통증이요. 그 느낌, 알 것 같습니까? 예진이가 저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래요, 저를 사랑해서 그랬겠지요, 에효.
통증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골프공의 컨디션을 살피며, 우리는 원래 하고자 했던 그 작업의 기회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괜찮겠지’나 ‘도저히 못 참겠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우리는 혹시나 하며 몇 번을 다시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보려 해도 아직은 안 됩니다. 빠따가 살짝만 움직이고 골프공이 어떤 낌새만 알아채도 그때마다 전해져오는 하복부 전체의 묵직한 통증은 참아낼 만한 것이 아닙니다. 아프다는 표현보다는 고통스럽다고 하는 게 정확할 듯합니다. 아픈 건 어떻게 참아보겠지만 이건 도무지 쉽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끌탕에 결국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누이려는 그때, 갑자기 예진이와 언니의 화장대 위에 놓인 물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하얀 물체 하나가 있었습니다. ‘맨소래담 로오션’ 바로 이놈입니다. 이거 모르는 분은 드물 거라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염진통제’ 바닥에서 수십 년 동안 굳건한 아성을 쌓아왔던 터줏대감인 ‘안티푸라민’을 순식간에 가볍게 제압해버린 미국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의 대표상품입니다.
무엇보다 일단 반갑다는 마음부터 울컥 듭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다른 통증에는 몰라도 지금의 저와 같은 타박통에는 이게 왔다지요. 저는 예진이에게 맨소래담 로오션을 가져오게 해 뒷면의 효능·효과가 쓰인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 진통 소염 삠 타박상 근육통 관절통 골절통 요통 어깨 결림 신경통...---
이건 뭐 닥치고 무조건 얼른 바르라는 얘기 아닙니까? 비록 ‘불알통’이란 단어는 회사 체면상 차마 표기를 못했겠지만 그거야 뭐, 이 로오션이야말로 오늘과 같은 이런 상황에 제가 쓰라고 만들어진 제품이 아닐는지요? 저는 마 그렇게 봅니다.
“그게 언제부터 집에 있었지? 그런데 오빠 그거 냄새도 맵고 되게 독한 거 아니야?”
급 화색이 도는 얼굴로 로오션의 뚜껑을 여는 저를 보며 예진이 걱정스레 묻습니다.
“아냐 아냐, 아무리 봐도 이게 딱이네. 이걸로 여기 통증을 좀 빼주고 골프공 속으로 멍든 게 일단 풀어져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야아, 그래도 이게 집에 있어서 다행이다. 예진아, 이거 얼른 발라줘 봐. 일단 발라 놓고 한번 지켜보자.”
어차피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자신 있게 로오션 통을 예진에게 내밀었습니다.
예진이는 자신의 손바닥에 조심스레 그것을 먼저 짜보았습니다. 특유의 싸아한 파스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 정도만 먼저 발라볼까, 오빠?”
손바닥에 부어진 하얀 로오션 액을 내보이며 묻는 예진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윽고 걱정스런 얼굴로 손가락에 조금씩 묻힌 로오션 액을 알집에 가볍게 펴 바르며 예진은 연신 물어왔습니다.
“어때 좀 괜찮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시원한 느낌이 들어, 오빠?”
굳이 예진이 물어오지 않더라도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좀 살 것 같습니다. 역시 바르는 소염진통제의 최고봉답습니다. 마치 갑작스레 탁 트인 바다를 만나 가슴 속 깊은 곳의 답답한 공기를 단숨에 뿜어내며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는 느낌입니다.
“어후, 좋다. 예진아 아예 한통 다 들이부어. 이거 완전 죽이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진짜. 진작 바를걸, 이제야 이걸 봤네. 그래그래, 얼른 통째로 부어서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발라봐.”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얼굴로 조심스레 손을 놀리던 예진이 제 말에 드디어 안심한 모양입니다. 이제부터는 손바닥에 하나 가득씩 시원스레 짜낸 로오션을, 탱탱 부어 있는 상태의 음낭과 골프공 여기저기 모두에, 듬뿍듬뿍 묻혀 바르기 시작합니다. 아직까지 알집 속의 골프공이 느끼는 통증이 적지는 않지만 흠뻑 처발라놓은 로오션 덕분에 약효가 성큼성큼 몸에 작용한다는 느낌은 벌써 시원스레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방 안 가득 싸아한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걱정했던 아랫동네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진다 싶자, 이제 다시 얼른 몸 좀 풀어보자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집니다. 이대로라면 아니 조금만 더 있어보면 될 것도 같습니다. 그렇죠. 내 얼른 이걸 정상화시키고만 나면... 확 그냥 응? 네.
“예진아, 약이 빨리 스며들게끔 손바닥으로 살살 조물락조물락 비벼가면서 좀 풀어줘 봐. 대신 살살해야 된다. 살살, 조심해서 응?”
“알았어 오빠, 조심해서 해볼게.”
독한 로오션의 냄새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기는 해도, 정성스런 손길로 알집과 골프공의 구석구석을 살살 비벼주면서 예진이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영화 잘 보고 나와서 간만에 사랑 한번 뜨겁게 해보려다 이게 뭔 꼴인가 싶을 텐데도, 내색 않고 온 신경을 집중해 골프공을 묵묵히 위무해주고 있는 사랑스런 이 여자아이에게 새삼 고마움이 느껴져 옵니다. 방금 전에 총으로 쏴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건 이미 기억에 없습니다. 참 이쁜 년입니다.
어라? 이건 또 뭔가요? 웃깁니다. 머리가 느끼는 고마움을 벌써 알아채고 제 맘대로 인사부터 차리는 녀석이 있습니다. 빠따 녀석입니다. 짜식, 웃기는 놈입니다. 이런 난리를 치는 통에도 어느새 또 고개를 든 채 눈치를 보고 있네요.
“오빠, 여긴 괜찮아? 여기도 발라줄까?”
예진의 눈에도 녀석이 웃기는 한편으로 기특해 보이나 봅니다. 사실 빠따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몸살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긴 불쌍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녀석 일어섰다 앉았다만 아마 100번은 넘게 했을 겁니다. 아예 그냥 두 시간 가까이를 서 있기만 한 적도 있었죠. 오늘 같은 경우 녀석도 일종의 성희롱 피해자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름 불러서 벌떡 일어서보면 아무 일 없고 다시 일어서서 둘러보면 아무 말 없어서 또 앉고.... 그렇습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오늘이 바로 2012년의 대통령 선거일 같은 날이라 할 만합니다. 네, 완전 개 x 같다는 얘기죠. 짠한 녀석. 어서 서둘러 골프공의 내상(?)을 치유하고 빠따 이 녀석에게 오늘 쾌락이니 환락이니 열락이니 이런 즐거울 락(樂)자 돌림의 모든 걸 실컷 맛보여줘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지퍼락’(?)에 갇혀 있었던 불쌍한 내 새끼니까요. 얼른 한상 거하게 차려줘야겠습니다.
“예진아, 골프공에 다 했으면 빠따 그 녀석한테도 좀 발라줘. 오늘 하루 종일 그 녀석도 꽤나 힘들었을 거야. 몸 좀 풀어줘야지.”
골프공에 대한 마사지를 충분히 마친 예진이의 부드러운 손길은 이제 스르륵 미끄러지며 빠따로 향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마사지를 받다보니 통증이 줄어드는 효과와는 별개로 몸에 느껴지는 감촉이 묘하면서 은근 괜찮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느낌이 아주 사람 죽입니다. 냄새가 좀 지독한 감은 있지만 나름 시원한 맛을 더해줍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찰박찰박 끈적거리는 로오션의 감촉은 지치고 풀이 죽어 있던 빠따를 절로 부추겨 녀석이 활동할 시간이 다시 왔음을 일깨웁니다. 이 수상하고 도발적인 미끈거림은 어쩌면 훗날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남자들이 장안동의 안마방에서 맛보곤 했다는 오일마사지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점점 안락하고 감미로운 느낌에 제 눈은 스르르 감겨갑니다. 아, 참 좋습니다.
“예진아, 로오션 좀 듬뿍 더 발라줄래?”
예진이의 손아귀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코앞에 닥친 출전(?)을 위해 몸을 한껏 부풀린 빠따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맨소래담 로오션을 추가 주문한 직후였습니다. 네, 바로 그 순간입니다. 어라? 이상합니다. 지금까지는 분명 시원하면서 뭔가 풀려가는 느낌이었는데 이 불길한 징후는 뭘까요? 갑작스럽게 화아- 해지는 이 수상한 느낌은 뭔가요? 아니 느낌이 아니고... 뭐가 이렇게 갑자기 확 오는 걸까요? 이거...이거 점점 따뜻한 느낌이더니... 아니 뜨끈뜨끈 하더니... 아니 화끈거리는 것 같더니... 아닙니다. 뜨겁습니다.
아니... 누가 제 아랫도리에 불을 붙인 모양입... 아니 그게 아니고.. 저에게 치정이나 원한 관계를 가진 어떤 씹어 먹을 놈들이 아예 화염방사기로 제 골프공이랑 빠따를 공격하며 지져대는 것 같습니다. 아, 미치겠습니다. 순식간에... 아, 이것은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이러다 사람이 죽지 싶습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답니까? 아이고 나 죽습니다. 누가 119에 전화 좀 해주세요, 제발. 소방차가 필요합니다. 얼른 이 불 좀 꺼주세요.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 불알에 내 x에 불났습니다. 아니 무슨 폭탄 맞은 것 같습니다. 누구든 저 좀 살려주세요. 아무래도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악....’
“예진아... 예진아... 어흑... 어흑... 아이고 나 죽네...”
“오빠 왜 그래? 오빠... 오빠!... 오빠!”
갑자기 몸부림을 치면서 울부짖는 저를 보며 예진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얼굴로 소리칩니다. 로오션이 잔뜩 묻어 번들거리는 두 손을 멈춘 채 아무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뭔가 대답을 해주고는 싶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고작해야 입에서 새나오는 신음과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팽팽히 힘이 들어간 눈으로만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따금 간헐적인 한두 마디 비명만 겨우 질러댈 뿐입니다.
침대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저는 아랫도리에 고개를 온통 처박은 채 움직이지 못합니다. 몸과 정신의 모든 부분이 오로지 통증에만 완벽하게 사로잡힙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입니다. 사람의 몸에 그것도 남자의 뿌리인 골프공과 빠따에 이토록 처절하게 뜨거운 불의 기운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실감할 수 있을까요?
청양고추와 할라피뇨와 타바스코와 하바네로를 적당한 비율에 맞춰 곱게 갈은 후 잘 섞습니다. 약간의 물과 소금 등을 넣고 걸쭉하게 반죽해 소스를 만든 후 그것에 두어 시간 담가 놓습니다. 그렇죠. 밑간이랄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후추를 더해 개운한 맛을 낸다거나 또 꿀이나 물엿을 첨가해 감칠맛을 더하는 것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을....
여기에 더해지는 중추적 필살의 일격! 종자 개량을 하지 않은 고추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맵다는, 청양고추보다 100배쯤 맵다는, 최루탄을 만드는 원료로도 쓰인다는, 맨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큰일이 난다는, 먹으면 사람의 혼이 빠져나간다 하여 유령고추로도 불린다는, 인도의 ‘부트졸로키아’ 고추. 이 부트졸로키아의 엑기스를 뽑아내 진하게 만든 검붉은 양념을 빈틈없이 골고루 몇 번이고 두텁게 덧바른 뒤 섭씨 3,500도의 불에 직화구이를 하는 겁니다. 뭘 굽느냐구요?
제 골프공과 빠따를요. 네, 불알과 거시기 말입니다. 그 정돕니다, 지금 느낌이. 이건 진짜 지옥입니다. 요리로 설명하니 어떻게 상상이 좀 되시나요? 요리 이름은 ‘죽음의 매운 불알 구이’ 내지는 ‘원자탄 불알 구이’ 쯤으로 할까요? 뭐 이런 정도면 설명이 된 걸까요? 그냥 대충이라도 제가 겪는 고통이 짐작은 되십니까?
아무튼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골프공과 빠따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최악의 주화입마에 빠졌다고나 할까? 뭐 그런. 맞습니다. 그만큼 형용하기 힘들 만큼의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안 겪어 본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갑자기 별 생각이 다 듭니다. 먹고 싶었던 거 미리 먹어 둘걸, 사이 안 좋았던 친구나 가족들과 미리 화해할걸, 마음을 너그럽고 편하게 가지고 살걸, 부모님께 좀 잘할걸, 착하게 살걸...... 아, 뭐지요? 이 기분은?
난생 처음 접하는 불에 타는 통증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꺼내며 한동안 사타구니만 감싼 채 버둥거리던 저는 예진이의 재촉과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욕실로 향했습니다. 불을 꺼야지요. 어서 가야지요. 물을 쏟아 부어야지요. 그래야 살지요. 이놈을 얼른 구해내야지요. 저 우리 집 장손입니다. 좋은 유전자는 아닐망정 집안의 대는 이어야지요.
그런데 이건 또 뭡니까? 비틀거리며 겨우 들어간 욕실에서 샤워기의 찬물 세례를 맞기 시작하고 삼십 초쯤 지나자 어럽쇼? 갑자기 이제는 좀 살 것 같습니다. 게다가 비누 거품을 잔뜩 내 벅벅 문대가며 몇 번이고 아랫도리를 씻어내자 마치 거짓말처럼 언제 그랬느냐 싶게 멀쩡해집니다. 너무 빨리 괜찮아지니 오히려 이상합니다. 신기합니다.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당으로 온 것 같습니다. 온통 불에 덴 듯 벌겋게 성나 있던 아랫도리 전체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아갑니다.
불과 1~2분 전만 해도 세상은 도저히 살아갈 곳이 아니더니 고통스런 용광로에서 빠져나와 지금은 시원한 바람 부는 계곡에 앉아 발 불알과 x을 담그고 있는 형국입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딴 세상 같습니다. 모든 게 꿈만 같습니다. 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얼른 다시 나가서 예진이를 침대에 던져 패대기쳐놓고 다른 황당한 일이 또 생기기 전에 거시기부터 일단 해결해놓고 봐야겠습니다. 제가 신체 건장한 대한민국의 남자라는 것부터 빨리 확인시켜줘야 하겠습니다. 네, 저 남잡니다. 그런데... 아니... 그게... 아니... 이게 무슨... 아닌가?’
이건 또 뭡니까? 이다지도 음습하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골프공이... 골프공이 이상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마에 시달리던 몸을 어찌어찌 찬물로 씻어 달래주자 구사일생의 기쁨에 목메어하던 골프공이 갑자기 뻣뻣해지며 굳어갑니다. 형언할 수 없는 또 다른 통증이 골프공을 엄습해 옵니다. 아 정말 미치겠습니다. 눈앞의 x 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골프공이 얼어옵니다. 정말로 쩌억 쩌억 어는 느낌이 듭니다.
내 신체의 일부가 얼어가고 있다는 느낌, 그것도 골프공이. 지독하게 재수 없는 이 느낌 혹시 아십니까?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통증도 통증이지만 이건 와락 겁부터 납니다. 아무래도 혈관에 무슨 큰 탈이라도 난 모양입니다. 겨울에 따뜻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맞으면 혈관이 마비되어 터지고 쓰러져서 한방에 가는 수가 있다는 뇌졸중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갑니다. 허걱! 그렇다면 이건 좆졸중? 불알졸중?
와! 이거 정말 미치겠습니다.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저 우리 집 장손인데... 그나저나 마치 몸에서 아랫도리만 남극으로 출장을 나가 얼어붙고 있는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 통증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샤론 스톤 아시죠? 영화 <원초적 본능>의 그 겁나게 이쁜나쁜년 말입니다.(계속 연식이 드러나네요) 거기서 그 계집이 마이클 더글라스 그 새끼랑(이쁜 언냐들 자빠뜨리는 영화배우 놈들은 굳이 존대할 필요가 마 없다고 봅니다) 침대에서 후루룩 냠냠 하는 장면을 찍더니 갑자기 냉장고로 가 얼음을 꺼내서 잘게 깨뜨리기 시작하죠. 얼음송곳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송곳으로 찍어대는 얼음이 제 골프공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 이쁜나쁜년이 얼음송곳으로 콕콕 조사버리는 얼음. 그 얼음의 자리에 제 골프공이 대신 있다는 겁니다. 네.
“크윽.. 큭.. 으윽.. 큭..”
신음 소리가 이번은 다릅니다. 대뇌의 전두엽에 전해져오는 느낌이 아까의 불에 타는 고통보다 훨씬 안 좋고 이번엔 더 죽을 것 같습니다.
“오빠, 좀 괜찮은 것 같더니 또 왜 그래?”
이번엔 또 왜 저러는가 싶어 욕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예진이가 묻습니다.
“여기가... 아흑.. 여기가... 막.. 쿡쿡.. 아흑... 아우 씨발... 미치겠네...”
이제는 욕까지 나옵니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환장할 노릇입니다. 아랫도리뿐만이 아니라 뱃속 깊은 곳까지 하복부 전체가 아예 감전이라도 되는 듯 뻐근해지며 불쾌한 기운이 하체를 뒤덮습니다. 음험한 기운과 함께 차오르는 통증도 그렇지만 왠지 이건 무섭습니다.
이쯤에서 잠시, 전 세계의 오지나 극지를 탐험하며 그것을 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 몸을 내던져 그것에 몰입되는 쾌감(?)을 통해 삶의 희열을 맛보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강렬한 익스트림의 욕망, 그것을 채우는 방법.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힘든 초극한의 체험을 하는 방법. 적도의 숨 막히는 열기와 남극의 가혹한 냉기를 순식간에 번갈아가며 맛보는 짜릿한 경험. 그거 비행기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집에서 얼마든지 손쉽게 가능합니다. 맨소래담 로오션과 샤워기만 있다면 그까짓 거 일도 아닙니다.
엉금엉금 욕실에서 기어 나온 저는 예진의 침대 위로 겨우 올라 상체를 벽에 기댔습니다. 몸은 얼어붙기 직전인데 엉뚱하게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건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습니다.
“오빠 좀 괜찮아? 어때?”
안타까운 마음과는 달리 이제는 어떻게 뭘 해볼 길이 없는 예진이는 물기를 머금은 슬픈 목소리로 걱정스레 묻기만 할 뿐입니다.
“니 눈엔 이게 지금 괜찮아 뵈냐? 어?....어?....에이 씨....”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제 입에서는 좋은 말이 안 나옵니다. 나쁘고 못났습니다. 지속적으로 방법을 달리 해 가해지는 통증에 짜증이 난 것은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꼭 통증 때문만은 아닙니다. 통증도 그렇거니와, 온통 벌거벗은 채 겨우겨우 기어 다니며 방과 욕실을 헤매는 제 모습과 달리, 어느 틈엔가 벗어놓았던 속옷을 갖춰 입고 바닥에 앉아 있는 예진을 보자 순간적으로 버럭 화가 치솟은 겁니다. 예진이 입장에서야 도통 뭐가 될 듯한 상황도 안 만들어지고, 계속 알몸으로 있자니 쑥스럽고 부자연스럽고 했을 겁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겠죠.
‘못난 놈, 그것 하나 이해를 못하고...’ 네, 압니다. 제가 못난 놈이라는 거 잘 압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저야 뭐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서러운데다, 홀딱 벗은 채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도 자꾸 들고, 되는 일은 없고, 무엇보다 아프기도 아프고, 슬슬 쪽팔리기도 하고... 에이 씨 모르겠습니다. 암튼 지랄 같은 상황인 건 분명합니다. 저의 속 좁은 투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왜 옷을 입고 있는 건데?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냐? 나랑 인제 안 할 거야? 장난해? 나랑 하기 싫어? 왜 옷을 입고 있느냐고?.....”
정말이지 못났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껏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니... 난... 그저... 미안해, 그래... 오빠... 알았어...”
조금만 더하면 울음보가 터져버릴 것 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예진이가 우물거립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예진이는 손을 뒤로 해 브래지어를 풉니다.
‘아, 미친 놈. 왜 자꾸만 저 아이한테.... 예진이가 뭘 잘못했다고.... 못난 놈, 나쁜 놈.’ 하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날선 말만 튀어나옵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고 있냐? 얼른 수건에 찬물 좀 적셔 와봐. 아우 미치겠네. 벌써 또 뜨거워지고 있잖아? 빨리!”
뜬금없는 주문이고 신경질 섞인 말투긴 했어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된 게 냉기가 좀 가신다 싶으면 금세 불같은 통증이 달려들고, 그렇다고 수건을 덮어 냉기가 조금만 오래 지속되면 순식간에 하체가 마비되고 오그라들면서 심하게 조여드는 통증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미칠 노릇입니다.
찬 물수건을 가져와 닦아주다가 받쳐놓기도 했고, 예진이가 쓰는 드라이기를 가져와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했고, 다시 수건을 적셔오고, 그렇게 우리 둘은 별 쌩쇼를 다해가며 골프공과 빠따에 매달렸습니다. 그만큼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서서히 우리는 지쳐가고 있었고, 이제는 비록 처음과 같이 죽을 듯한 통증까지는 아니라 해도, 홀딱 벗은 채로 벽에 기대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물에 적신 수건과 드라이기를 손에 쥐고 제 골프공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예진이에게 수건을 올려라 내려라 신경질 섞어 지시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자세를 한번 설명해볼까요? 저는 L자 내지는 등을 뒤로 30°쯤 기댄 자세, 그리고 예진이의 자세는 OTL(이 그림 다들 아시죠?)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예진이의 얼굴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홀딱 벗은 사타구니를 양쪽으로 활짝 벌린 상태로 제 몸의 한가운데에 놓인 골프공과 빠따가 예진이의 얼굴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툴지만 그림으로 보자면 oIo을 OTL이 정면에서 마주보고 있는 그런... 물론 둘 다 옷은 벗은 상태입니다. 만약 우리 둘의 그런 모습을 누가 봤다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겁니다. 에효.
네? 예진이 얼굴이 왜 거기 있냐구요?
“후...아...후... 아...후...아...후...아...”
예진이는 밤새 제 골프공에 바람을 불어주었습니다. 수건을 얹었다 내렸다 하다가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말았다, 그렇게 해가면서 예진이는 밤을 새워가며 제 골프공을 간호해주었습니다. 제 눈치 보느라 속옷도 못 입은 채 말입니다. 우리들의 벌거벗은 슬픈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쯤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우리 집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제 골프공과 빠따의 안부를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시켜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일단, 골프공은 아직도 적잖이 부은 상태로 욱신거릴 때면 식은땀을 간간이 흘려가며 바닥에 짜부라져 있는 상태입니다. 짠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했던 묵묵한 골프공의 ‘무명의 헌신’적 살신성인과 멸사봉공 정신에 새삼 존경의 염을 표합니다.
그리고 빠따? 음... 빠따는... 불쌍한 빠따는... 뇌사 상태? 좆졸중? 네, 그 정도쯤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굳이 상태를 설명하자면 대략 3만 년쯤 전부터 소금에 절였다 꺼내놓은 오이의 모습이랄까? 뭐 그쯤 됩니다. 안타깝네요. 녀석에게서 생명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빠따로서의 삶은 이제 모두 끝이 나버린 걸까요? 한때의 좌충우돌 서슬 푸르던 기개는 간 데 없고 녀석은, 힘겹고 고단한 삶에 지쳐 눈감은 노숙자의 널부러진 몸처럼, 볼품없이 허물어진 채 누워 있습니다.
죽었냐고요? 모르겠습니다. 설사 살아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산 것이겠습니까? 다만 마지막 고통의 몸부림이었던 듯 아직도 간간이 맺혀 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끈적한 눈물이 녀석의 치열했던 삶을 조용히 웅변해 주는 듯합니다. 에효, 가슴 아프고 속상합니다. 이제는 그만, 이 녀석들 얘기는 안 하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그날 밤의 힘들었던 그리고 안타까웠던 얘기도 이쯤 하렵니다. 다만,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욕정에 눈이 멀어 기어이 몇 번을 다시 시도하고자 애썼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습니다. 어찌어찌 겨우 상황을 만들어 욕심을 내볼만 할 때가 되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온몸을 휘몰아치던 전율할 고통의 기억이 또한 있습니다. 안타까움에 밤새도록 입에서 새어나오던 수많은 한숨들은 벽에 걸린 시곗바늘을 성큼성큼 앞으로 밀어내기 바빴습니다. 우리들의 시간은 이제 다해가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깊이 안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그래서 더욱 어떻게 해서든 결합하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언젠가부터 제 머리 속에는, 서로의 성기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상대의 입에라도 의존해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네, 그렇게 해서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참 말을 꺼내기가 힘든 것이더군요. 서툴기는 할망정 오랄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골프공 때문에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 입으로 해달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앞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 차례 머뭇거리기는 했을망정 저는 예진이에게 제 마음을 아니 저의 욕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흔쾌히 그것에 응해주었습니다. 몇 번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아니 그러나가 여기에는 맞겠네요. 그러나 결국 우리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골프공의 내상이 너무 컸던 탓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밤을 넘어 새벽녘이 되자 골프공은 이제 아예 빠따를 세워주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갖은 악전고투를 치루면서도 우리는 끝내 사랑의 쾌감을 맛보지 못했고, 우리의 밤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유치하지만 저는 예진이에게 오랄을 청했던 것이 몹시도 미안하고 구차스럽게 느껴졌고 부끄럽고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물론 속도 많이 상했지요. 그래선가 봅니다. 그 밤 이후로 기억이 자꾸 거짓말을 합니다. 마치 제가 스스로 예진이를 위해 아끼며 배려하며 쿨하게 물러섰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습지요.
네, 그날 우리 못했습니다.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 결국 예진이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려가면서까지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못하고 말았습니다.(골프공의 데미지가 정말 컸습니다. 당장 다음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더군요. 실제 그날 이후로도 열흘 넘게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참, 병원에는 두 번을 갔는데 그때마다 간호사가 어금니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아가며 그곳에 팩을 해주었습니다. ‘고환 통증 완화 및 음낭 영양 보습팩’ 이라는 어마어마한 팩이었습니다. 불알에 팩하고 누워 있는 기분 혹시 아십니까? ㅋㅋㅋ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생성되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과 그리고 잊혀가는 것들이 수없이 공존하며 또한 교차합니다. 요즈음 TV를 통해 인구에 회자되는 <응답하라 1994>를 보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추억합니다. 한때 너무나 당연하게 어느 곳인가에 존재하던 것들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이 끝나는 지점인 망우리고개로 가는 길에 위치했던 상봉동 버스터미널 역시 그런 곳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없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이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의 홈플러스 건너편에 존재했던 것처럼, 198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어느 부분에서는 상봉동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습니다. 한강의 북쪽에 사는 이들이 강원도 가는 버스를 타려면 상봉동터미널로 가야 했습니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던 수많은 군인들의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떠나거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시절의 많은 군인들에게 상봉동터미널은 또 하나의 시대적 상징입니다.
일주일의 짧은 휴가는 쏜살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휴가의 마지막 날입니다. 네,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저와 예진이는 상봉동터미널에서 만났습니다. 휴가 기간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그랬던 것처럼 반갑게 만났지만 오늘은 좀 다릅니다. 헤어지기 위해 만난 거니까요. 둘 다 마음도 표정도 무겁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아침 일찍부터 만나 손을 마주잡고는 있지만 마땅히 할 일이나 갈 곳은 딱히 없습니다. 휴가 복귀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아침식사를 팔기 위해 일찍 문을 연 식당을 들어가 밥까지 먹고 나왔는데도 겨우 아홉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타야 할 버스는 열한 시에 있습니다. 두 시간,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터미널 주변을 손잡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작게 한 바퀴를 돌고, 크게 한 바퀴를 돌고, 더 크게 한 바퀴를 돌고, 훨씬 크게 천천히 한 바퀴를 돕니다. 수많은 중국집들과 고깃집들과 치킨집들을 지납니다. 수많은 술집과 다방과 당구장과 여관과 각종 상패나 기념 물품들을 파는 가게와 오바로꾸 가게들과 군용 물품을 판매하는 집들을 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꽤나 많은 곳의 이발소를 지나쳤습니다. 아무래도 예진이가 신경이 쓰여 피한다고 하며 다니는데도 이발소는 큰길이고 골목길이고 할 것 없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빠, 웬 이발소가 이렇게 많아?” “휴가 나올 때 미리 다들 이발하고 나오는 거 아니야?” “그냥 복귀해서 하면 될 걸 뭐 하러 돈을 내고 밖에서 이발을 해? 비쌀 텐데?” “이상하다. 왜 아줌마들이 군인들을 이발소로 데리고 들어가?”
이해하기 힘든 거리의 풍경에 예진이는 계속 질문을 쏟아냈지만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은 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얘기해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왜 터미널 근처의 이발소를 찾는지, 기껏 들어간 이발소에서 왜 이발도 하지 않은 채 나오는 건지, 들어가고 나올 때면 왜 그리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표정들인지, 이 아이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버스의 출발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헤어질 때가 된 겁니다. 기다리느라 앉아 있던 대합실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저는 예진이의 어깨를 안았습니다. 조용히 안겨오는 그녀에게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집니다. 슬퍼서 우나 봅니다는 개뿔, 생글거리며 웃고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고 다 죽어가는 상이더니 갈 때 버스 안에서 먹으라고 음료수랑 간식거리를 사오면서부터 자꾸 얼굴에 웃음기가 돕니다.
“아쭈, 웃음이 나오냐, 지금? 아, 맞구나. 그래 일주일 내내 지긋지긋했던 군발이 보내니까 속이 시원하다 이거지? 드디어 자유라 이거지? 그렇지?”
마음에도 없는 농담을 던지며 저도 애써 쾌활한 척 해봅니다. 기껏 웃자고 꺼낸 농담이건만 예진이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가볍게 농담 한마디로 받아주면 좋으련만 저만 쑥스럽습니다. 번번이 느끼지만 헤어지는 이 시간은 참 쓸쓸합니다.
상병쯤 되는 군인이라면 이제는 만남에도 이별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이별의 순간에는 아직도 매끄럽게 행동하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애써 밝게 지은 얼굴로 인사를 던지며 예진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어럽쇼? 예진이가 저를 따라 차에 올라탑니다. 제 옆자리로 와 냉큼 그곳에 앉습니다. 이 아이 왜 이러는 걸까요? 버스는 곧 출발하려 합니다.
“예진아, 뭐해? 얼른 내려. 버스 금방 출발할 거야. 얼른 내리라니까?”
애가 달아 재촉하는 제 말을 들은 예진이는 흘깃 한번 저를 쳐다보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펴보입니다. 예진이의 손에는 제 군복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상봉 – 간성’이라고 붉은 색 글자가 쓰인 버스표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진이의 눈만 바라보았습니다.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경쾌한 목소리로 예진은 제게 말을 건넵니다.
“우리 같이 가자, 오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터미널의 승강장을 향하고 있던 버스의 머리가 반대 방향의 출구를 향해 커다랗게 회전하며 돌아서자 몸이 느끼는 온도가 벌써 낮아지기라도 한 듯 온몸이 미세하게 떨려옵니다. 좀 전까지 서울을 향해 서 있던 버스는 이제 강원도를 향합니다.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자 그나마 간간이 보이던 익숙한 도심의 풍경도 사라져버리고 곧 투박하고 쓸쓸한 국도의 모습만이 이어집니다. 꼭 쥔 서로의 손을 굳게 깍지 낀 채 예진과 저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바라봅니다. 예진의 갑작스런 승차로 물론 뜻밖의 기쁨을 맛보고 이별의 시간을 잠시 늦추기는 했어도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기분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오빠.”
잡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또 다른 제 한손을 잡아오다보니 자연스레 품에 안기는 모양새를 취하며 예진이 제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둘이 밀착되는 통에 오른 팔뚝에 예진의 가슴이 묵직하게 눌려오는 느낌이 전해지며, 스물 둘 처자에게서 풍길법한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간지럽게 합니다. 내 여자의 냄새입니다. 기분 좋은 순간이지 말입니다.
“왬마”
이상합니다. 고맙고 사랑스럽고 또 헤어지는 게 안타까워 미치겠는 그런 마음은 어떡하고 어쩌자고 이런 퉁명한 대답을 내뱉는 걸까요? 그래도 예진이는 내 마음 다 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피식 웃으며 한동안 제 눈을 쳐다보다가 묻습니다.
“오빠, 이 버스 내가 왜 탔는지 알아?”
저는 예진의 눈을 쳐다본 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건네는 예진의 표정에 웃음기가 묻어 있습니다.
“치잉... 안 궁금해? 내가 갑자기 이 차를 탄 게 궁금하지 않냐구?”
살짝 머금은 웃음 위에 장난스레 토라진 표정을 더하며 예진이 대답을 재촉합니다.
저 표정, 아 미치겠습니다. 부대에 복귀하기 싫습니다. 군대고 집이고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둘이 이대로 손잡은 채 세상 끝 어딘가로 멀리 사라져 버리고 싶습니다. 그로 인한 대가를 아무리 혹독하게 치른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뭔데 임마.”
이렇게밖에 대답을 못하는 제가 맘에 안 들지만 별 수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합니까. 이 아이에게는 그래도 됩니다. 이미 이런 말투에 익숙한 예진은 다시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제 팔을 당기며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나 아까 음료수 사러 갔었잖아? 그때 화장실도 갔거든.”
다시 아무런 말없이 저는 예진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도무지 뭔 소리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빠, 있잖아. 내가 화장실에서 오줌 누는데 말이야.... 이렇..게.. 쪼그려서 앉아 있는데 말이야...”
이건 또 뭔가요? 얘가 이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요? 뭔 오줌 싸는 얘기를 막...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 애인인데... 아무리 이뻐도 그렇지... 얘가 지금... 내가 지 남잔데...’ 순간적으로 저도 피식 웃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그다지 궁금하다거나 그럴 이야기 같지는 않았습니다. 화장실이 뭘 어쨌다는 건지 원.
“있잖아, 오빠? 아까 오줌 누는데... 왠지... 저기... 밑에서... 파스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거야, 오빠. 이상하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벌써 3일이나 지났고, 씻어도 벌써 몇 번을 씻었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했는데, 오빠. 그 냄새가... 정말 맨소래담 그 로오션 냄새가 났어. 정말이야. 이상하지?... 근데 그 냄새가 느껴지니까... 우리가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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